혈우병은 이미 유태인 전래서인 탈무드에 언급되는 오래된 희귀질환이다. AD 2세기경 랍비 유대인들은 할례 의식(포경수술)에서 남자 아기들이 피의 출혈이 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할례에 대해 2명의 사내아기가 출혈의 병력이 있다면 3번째 남자 아기는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을 마련했다.
혈우병(hemophilia)이라는 용어는 ‘피(hemo)를 사랑한다(philia)’는 뜻의 그리스어로, 1823년 스위스의 의사 호프(Hopff)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혈우병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1803년 미국의 의사 오토(J.C. Otto)가 특정 가족을 대상으로 해서 조사하면서 처음 시작됐다. 이를 통해서 혈우병의 증상과 더불어 유전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혈우병은 워낙 희귀난치성 질환인 만큼 국내에 혈우병 환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코헴회에 등록된 우리나라 혈우병 환자는 2천명 정도로, 등록되지 않은 환자를 포함하면 약 3천여명으로 추산된다.
17일 ‘세계 혈우인의 날’을 맞아 희귀난치성 질환인 ‘혈우병’에 대해 알아본다.
왕가의 병 ‘혈우병’…”여성 NO, 남자만의 저주”
혈우병은 선천성, 유전성으로 혈액응고인자의 결핍으로 인해 발생되는 질환이다. 또 혈우병 환자들은 선천적으로 출혈하기 쉬운 체질로 자발적이거나 경미한 외상에도 쉽게 출혈한다. 이럴 경우 지혈이 잘 되지 않아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유전형식은 혈우병 가족에 속하는 여자에 의해 그 유전자가 자녀에게 전해진다. 예를 들면 보인자의 어머니로부터 아들에게 유전된다. 따라서 이 질환이 나타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남자아이이고, 여자아이에게는 드물게 나타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혈우병은 혈액응고 인자의 결핍에 의한 출혈성 혈액질환으로 유전에 의해 전해진다. 혈액응고인자 가운데 대부분(75∼80%)에서는 제8응고인자의 결핍(A형 혈우병) 때문이고, 나머지에서는 제9응고인자의 결핍(B형 혈우병) 때문이다. 증상은 전신적인 출혈경향을 일으키며 출생 직후부터 나타나는데, 신생아에서 배꼽이나 포경수술부위에서 출혈이 계속되거나 치아가 처음 나올 때 출혈을 잘 일으킨다.
혈우병은 대개 생후 9개월부터 아기가 혼자 걷기 시작할 때 넘어지면서 우연히 무릎 관절 내에 출혈을 잘 일으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혈우병은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에 이 혈액응고인자를 농축해서 환자에게 투여하면 혈우병을 치료할 수 있다. 최근에는 단일클론항체 기술이라는 유전공학을 이용한 혈액응고인자 농축제 생산 방법이 개발되어 혈우병 치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처 등으로 일단 출혈이 시작되면 아예 지혈이 안 되거나 만약 지혈이 되더라도 매우 몸이 망가지는 희귀질환 혈우병은 오로지 남자에게만 생길 뿐 여성은 발병 유전자를 가졌어도 병증이 거의 발현되지 않는 ‘남자만의 질병’이다.
인체는 피가 혈관 밖으로 흐를 때면 이를 멈추게 하는 지혈 메카니즘을 작동시킨다. 인체에는 지혈 메커니즘에서 작용하는 단백질 성분인 혈액응고인자가 13가지 정도 있다. 지혈 매커니즘 과정에서 제8 응고인자가 부족해 지혈이 되지 않는 경우를 ‘A형 혈우병’이라 하고, 제9 응고인자가 부족해 지혈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B형 혈우병(크리스마스병)’이라 한다.
‘혈우병’이 세계사에서 각인된 것은 대영제국을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혈우병 보인자였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혈우병은 ‘왕가의 병’으로도 불린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은 당시 유럽 왕가의 풍조대로 다른 나라의 왕가와 서로 결혼하면서 혈우병은 유럽의 여러 왕가로 퍼지게 되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 중에는 1명의 아들과 3명의 손자가 혈우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빅토리아 여왕의 두 딸 중에서 한 딸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황제 니콜라스 2세와 결혼해 혈우병 환자인 외동아들을 낳았고,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로 시집간 다른 딸 역시 부르봉 왕가에 혈우병을 가진 아들이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즉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들은 하나의 X염색체에 혈우병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 다른 하나의 X염색체에 혈우병 유전자가 없어서 혈우병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자손에게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었다.
두 X염색체에 모두 유전자가 있는 경우에는 모체 내에서 죽기 때문에 여자 혈우병 환자는 없다고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였던 알렉산드라 공주 역시 혈우병 보인자로 추정된다. 그녀는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 황제와 결혼했고, 그녀에게 내재해 있던 혈우병 유전자는 러시아의 왕위 계승자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전달됐다.
혈우병의 ‘불량상식’ 5가지…’진실과 오해’
혈우병은 아직도 완치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질환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응고인자를 투여하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한 상황이다. 완치가 어렵다는 얘기는 결과적으로 환자들에게 공포감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러한 공포감에 기인해 혈우병은 여러 가지 불량상식을 양산하고 있다.
1. 혈우병은 유전으로만 생긴다?
혈우병은 유전자의 선천성, 유전성 돌연변이로 인해 혈액 내 13가지 응고인자 중 하나가 결핍되어 지혈에 문제가 발생하는 질환이다. X 염색체에 있는 성염색체 열성으로 유전되는 유전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약 30%의 경우는 가족력이 없는 경우에서 돌연변이로 발생하고 있고, 후천성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혈우병을 A(8인자결핍: 75%)형, B(9인자결핍: 15%)형으로 구분하나 정확한 진단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A형, B형뿐만 아니라 7인자결핍, 11인자결핍, 13인자결핍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2. 혈우병은 남자에게만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혈우병은 남자에게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자의 경우에서도 드물지만 남자에게서 볼 수 있는 각각의 응고인자 결핍 혈우병을 볼 수 있다. 특히 본빌레브란트와 7인자결핍 혈우병에서는 여자의 경우가 남자보다 더 많은 비율로 나타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3. 혈우병 환자가 베이거나 상처를 입으면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
혈우병에 대해 가장 큰 오해는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이거나 상처를 입는다고 해서 피를 분출하거나, 출혈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하지도 않는다. 상처가 나을 때 출혈량은 다른 사람과 같으며 단지 더 오래 지속될 뿐이다. 혈우환우협회 한국코헴회에 따르면 혈우병은 외상보다도 근육과 관절에서 출혈이 반복될 수 있으며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응고인자들이 개발되어 많은 혈우환우들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4.혈우병 환자는 운동을 하면 안 된다?
혈우병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출혈을 예방하기 위해 되도록 육체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근육은 관절을 보호하며 일상생활에서의 사고를 막을 수 있고, 튼튼한 근골격계를 갖추는 것은 자연 출혈의 빈도를 낮추기 때문에 혈우병 환자 역시 근육과 관절을 강화시키는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근골격계와 심혈관계 강화에 좋은 수영이나 자전거 등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고, 부위별로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도 좋다.
5.혈우병은 완치가 불가능하다?
혈우병 환자의 완치방법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출혈이 생겨 통증이 심할 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고인자의 정맥투여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환자에게 부족한 응고인자를 투여하면 완치는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현재 혈우병 환자 치료에 쓰이는 응고인자는 혈장제제와 유전자재조합제제로 나뉜다.
전통적인 혈우병 치료제인 혈장제제는 혈액 성분의 일종인 혈장에서 필요한 성분만을 물리, 화학적인 방법에 의해 고순도로 분리한 것이며, 유전자 배양을 통해 개발된 유전자재조합 제제는 안전성이 뛰어나 환자들이 최근 선호하는 추세다.
이밖에 치아를 뽑을 때나 피부가 절개되는 모든 종류의 외과 수술 시에는 사전에 응고인자를 주사해야 한다. 지난 2006년 우리나라에서도 간 이식을 통해 혈우병을 완치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