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 빠져있던 시절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다.
"컴퓨터가 밥 먹여주냐?"
그 당시는 속상했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힘을 얻는 주문처럼 돼 버렸다. 힘들고 지칠 때나 미래가 두렵고 우울할 때 마다 그 시절 그 때를 생각해 본다.
1990년대 중반, 고등학교 때 컴퓨터를 처음 만져봤다. 컴맹이라 매일 수 차례 OS를 날려먹고 A/S 기사님에게 혼이 나면서 컴퓨터를 알아갔다. 그래도 마냥 재미있고 너무 좋았다.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고 프로그래밍이 너무 좋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몇 일씩 밤을 새기도 했다. C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네트워크에 돌아다니는 패킷을 보기도 하고 변조해서 날려보기도 했다. 웹에 관심이 생기면서 Perl이나 C언어로 CGI 게시판을 만들기도 하고 PHP를 공부하면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개인 홈페이지(hooni.net)는 2001년 부터 지금까지 십 수년간 여러 번 리뉴얼을 거쳐왔다.
하지만, 주변 어른들은 내 전공에 대해 걱정하셨다. 앞으로 영어와 컴퓨터는 누구나 하게 되는데 왜 굳이 그걸 전공 하느냐고 말이다. 특히, 아버지는 수시로 이런 말씀을 하시며 투덜대셨다.
"컴퓨터하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돈을 벌어야지.. 돈을.."
사실이다. 그 때는 정말 그랬다. 1990년대 후반은 IMF 금융위기 직후라 돈에 민감한 시기였다. 내가 진학한 IT 분야가 잠깐 뜨기 시작했지만, 불과 몇 년 후 닷컴 버블이 빠지면서 오히려 3D업종이 돼 버렸고 관련 학과도 인기가 시들었다. 똑똑한(?) 사람들(좋은 학벌 고학력)은 이미 다른 분야로 떠나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기들도 많아졌다. 아직도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공돌이(찌질함?)의 대명사가 돼 버렸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도 나는 내 전공이 좋아서 계속했고 졸업 후 지금까지 십 여 년이 흘렀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다른 친구들이 취업 걱정을 할 때 나는 컴퓨터 하나 잘해서 좋은 환경의 대기업에서 좋은 사람들과 재밌게 일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경험과 경력으로 NIW영주권을 받아서 미국에 왔고 더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고 있다. 어쩌면 앞서 말했듯이 더 똑똑한 사람들(?)이 이미 다른 분야로 많이 떠나버려서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좋아하니까 재밌고, 재밌으니까 저절로 잘하게 되고 인정을 받게 되고 이런 패턴이 계속 선순환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다른 분야보다 더 빠르게 바뀌고 지금 내가 가진 무기가 언젠가는 쓸모가 없어질 수 있으니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면 우울할 때가 있다. 그리고 매 순간 내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의심하고 다른 선택과 비교도 해보게 된다. 이미 십 수년간 일하고 있지만 이런 생각은 계속 반복된다. 그럴 때 마다 잘했던 과거를 회상해보며 '그래!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다독여 본다. 정답 없이도 꾸준히 잘 헤쳐왔던 과거를 뿌듯해 하면서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다.
컴퓨터가 밥 먹여 주냐?
네! 밥도 먹여주고 돈도 줍니다. 덕분에 잘 살고 있어요.
미국 사무실 내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