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문체들이 있다. ‘보그 병신체’와 ‘인문 병신체’다. 보그(Vogue)는 유명한 패션 잡지다. 그 한국어판에 나오는 기사 문체가 ‘병신’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바로 보그 병신체다. 영어나 불어 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고 토씨만 한글로 적어놓는 문장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게 이런 것이다. ‘뉴 이어 스프링, 엣지 있는 당신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은 실크화이트 톤의 오뜨 꾸뛰르 빵딸롱’. 한글로 표현해보면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당신의 새 봄 필수품목은 흰 비단결 같은 고급 양장 바지’ 정도가 아닐까. 전문가 눈에는 이 또한 제대로 된 번역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는 이런 병신체를 꼬집는 게시물이 많다. 이런 표현도 있다. ‘아티스틱한 감성을 바탕으로 뀌틔르적인 디테일을 넣어 페미닌함을 세련되고 아트적인 느낌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예술적 감성을 바탕으로 고급 의상의 섬세함을 넣어 여성적 느낌을 세련되고 예술적 느낌으로 표현합니다’일 것이다. 국내 한 백화점이 입점한 옷 상표를 소개하는 입간판이다. 이 입간판을 찍은 사진을 올린 한 누리꾼은 게시물의 제목으로 “이게 말이야, 방귀야”라고 비웃었다.
인문 병신체는 뭘까. 3년 전쯤 한 포털에 블로그를 운영하는 프랑스 철학 전공자 글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철학자는 당시 다른 학자의 ‘병신체’ 글을 힐난했다. 그러면서 ‘나의 텔로스는 리좀처럼 뻗어나가는 나의 시니피앙이 그 시니피에와 디페랑스되지 않게 하므로써 그것을 주이상스의 대상이 되지 않게 콘트롤하는 것이다’라는 표현도 가능하다고 비꼬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포털에서 그 용어들을 검색해보면 대충 이렇게 풀어놓을 수는 있겠다. ‘나의 본질(끝)은 땅속 줄기처럼 뻗어나가는 나의 기호가 그 의미와 차연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것을 즐김의 대상이 되지 않게 조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번역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라캉, 들뢰즈, 가타리, 데리다 등 철학자들이 고안·규정한 개념을 설명없이 아무렇게나 나열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놓고 당시 학자들과 전공자, 그 블로그 구경꾼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몰라서 저렇게 쓴 것인가, 아니면 알고도 잘난 체하려고 쓴 것인가’가 비판의 중심이었다. 옹호하는 쪽은 ‘블로그 글은 대중을 겨냥해 쓴 게 아니어서 시비 대상이 될 수 없다, 쉬운 글만 읽으면 공부가 되겠느냐, 한글로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워 결국 그 개념대로 써줘야 한다’고 했다.
어느 쪽이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다. 다만 불온한 태도를 지적할 수는 있겠다. 혹시 ‘난 이런 어려운 것도 알고 있다고 잘난 체하려고’, 아니면 ‘모르면서 아는 체하려고 저렇게 쓴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게 패션과 인문학만의 문제뿐일까. 법률 용어도 외계어와 다를 것 없다. ‘사위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기망하고 기왕증을 누락해’는 ‘거짓 등 옳지 않은 방법으로 속이고 과거 병력을 빼’ 정도로 해석이 될까. 또 의학·건축 등 소위 ‘전문가’들이 있다는 부문에서 이런 ‘병신체’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영화나 음악 분야는 어떨까. 한 누리꾼이 올린 인용문이 딱 그렇다. ‘영화란 미적으로 분절화된 텍스트를 감독 특유의 미장센의 정치적 렌즈를 통해 풀어내는…’이란다. 클래시컬, 재즈 음반 해설지에도 ‘병신체’와 번역체 문장이 가득하다.
‘병신’이라는 단어는 ‘불구, 무능, 부족, 불편, 편향’ 등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단어다. 이런 올바르지 않은 태도 때문에, 병신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이 단어가 선택돼 ‘병신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그만큼 그 문체가 ‘불구, 무능, 부족, 불편, 편향’과 상대 비하의 특질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간 썼던 기사들을 다시 열어보며 곳곳에서 나의 병신체와 마주치고 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14212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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